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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1월 7일 오전 08:37

roy123 2014. 11. 7. 08:40

 

 

신라 왕과 왕후의 의복

 

고구려 복식은 양성 모두 저고리가 엉덩이까지 내려왔으며 아래는 바지를 입어 귀부인일수록 바지의 폭이 넓어지는 특징이 있었다. 다만 남자는 저고리와 바지를 입었고 여자는 저고리에 바지나 치마를, 혹은 저고리와 치마를 겸해서 입었다. 일반적으로 중국의 복식과 많이 다르지는 않으나 고구려의 경우에는 좌임, 우임, 합임(양쪽 어느 곳으로 모으지 않고 가운데로 모아 입은 형태) 등 세 종류가 공존하여 나타났고 상투나 자연스럽게 풀어헤친 머리 형태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명주와 무명, 삼베를 이용하여 미적 측면도 추구한 점은 유목 민족과 구분지을 수 있다. 또한 고구려인은 항상 전투복과 같은 옷을 입고 다녀 비상 사태에 대비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고구려 사람들이 옷의 활동성을 중시했기 때문으로 복식이 뒷받침되었기에 전쟁에서도 능할 수 있었다. 고구려에서는 양잠이 발달했으며 옷감의 색 또한 다양해 흰색, 검정색, 노란색, 보라색 등이 쓰였다.

백제의 복식은 다른 예술 분야와 마찬가지로 그 아름다움이 두드러졌으며 고구려에 비해서는 여성적이다. 고이왕 27년(260년)에 정해진 관복의 제도에서는 관복의 색감에 대한 정의가 내려질 정도로 의복이 발달되어있었다. 복식은 고구려와 흡사했으며 공식적이거나 그 중요성이 높을 경우 여인들은 머리 장식을 했다. 남자의 경우 고구려와 비슷하게 포를 넓게 하여 항시 입었던 것은 동일했다. 때문에 관모에도 신하들의 직급에 따라 장식 자체가 구분되었으며 임금은 금제, 좌평~나솔까지는 은제를 부착하도록 했다.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늦게 발전한 만큼 훗날 두 나라와 중국의 문물을 급속도로 받아들이면서 복식에 대한 개념도 성장했다. 신라 때 전해진 당나라의 복식을 통해 남자 귀족들은 먼저 당나라의 복식을 입게 되었으며 신라가 당의 복식을 들여온 것은 진덕여왕 2년(648)을 전후한 시기로서 당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한 증거가 된다.

신라도 이중적인 복식 제도를 취한 점이 비슷하여 고위층, 귀족들은 당나라의 복식문화를 수용하여 당나라의 옷 형태가 융화되는 한편, 백성들은 기존에 입던 저고리바지, 저고리치마의 형태를 입었다. 더군다나 백제와 고구려의 영향에서 동떨어져 있지 않았던 신라는 독자적인 복식을 겸용하여 발달해 나갔다.

삼국시대는 문헌과 자료가 많이 부족하여 고증이나 복원에 어려움이 있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이에 따라 가야의 경우에도 그 복식을 고증하는 일이 상당히 버거운 일이었다. 고령군은 대가야인의 복식이 목부분이 둥근 곡선 깃 저고리를 입는 점에서 신라와 다르다는 사실과 함께 가야제 철제도구에서 나타나는 무늬들을 세부 문양으로 채택했다고 밝혔다.

삼국시대에 귀족 여성들은 아주 긴 형태의 치마와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저고리를 입어 허리에 혁띠를 착용했으며 남성의 경우 펑퍼짐한 형태의 바지를 입고 좁고 남방과 비슷한 형태의 좁은 저고리가 허리 부근까지 오도록 입어 혁띠를 착용했다. 이 때 저고리는 단을 접어 입는 것이 특징이었다.